이제 민간인이 된, 이 홈의 또 다른 주인인 나의 남자친구와 함께 새로 생겼다는 크리스피 크림 도넛에 다녀왔다. 맛있다는 말을 굉장히 많이 듣고 본 터라, 엄청난 기대를 하고 갔음에도 전혀- 실망하지 않아서 놀라웠다. 기다리는 동안 나눠주는 기본 도넛부터가 일단 먹으면서  싱글벙글 웃게 만들었기 때문에, 도넛을 고르는데 있어서 크게 고민하지 않고 일단 땡기는걸 줏어 담았는데, 모두 가격이 동일했다. 던킨보다 조금 비쌌지만 (그리고 크기도 작지만) 만족한다. 특별한 날에나 먹을 수 있겠다. 그래도 맛있어서 행복했다.


그리고 버스를 타러 돌아오는 길에 귤을 샀다. 손톱 밑이 노랗게 되도록 까먹어도 질리지 않는, 겨우내 내사랑 귤. 늘 엄마가 사오던 귤만 먹다가 내 손으로 몇번 귤을 사보니, 그 몇번만에 대형마트보단 시장이 싸다는 이치를 깨달았기 때문에 별 망설임 없이 한소쿠리에 2000원이라는 파격적인 가격의 귤을 샀다. 거진 다 팔고 몇개 안남아서 그런지 아저씨가 다섯 소쿠리에 6000원에 주겠다고 해서 굉장히 솔깃 했지만 차도 없는 뚜벅이로서 너무 무거운건 무리니까... 하고 아쉬움을 남긴채 일단 두 소쿠리만. 그것만도 꽤 무거웠다.


여기까진 다 좋았다. 도넛도 맛있었고, 버스 안에서 정말 처량하게 자고 있는 작대기 3개의 상병을 보면서 오빠랑 쯔쯔, 안됐군, 하고 혀를 차기도 하고(이제 갓 민간인인데도, 군바리와 민간인은 체감하기에 엄청난 차이가 느껴진다. 오빠가 아직 군에 있었다면 난 그 군복을 보며 애틋한 감정이랄까, 멋있어 보인달까 하는 감정들을 느꼈겠지. 하지만 오늘 0시00분 부터 내 남자친구는 군법 적용조차 받지 않는ㅡ어제 전역이었지만 어제가 끝나기 전까지는 군법적용을 받고 있는다고 했다ㅡ확실한 민간인이 되었기 때문에, 나이롱이지만 이제 다 겪고 끝난 사람의 시각에서 보니 어쩐지 안됐구나..하는 느낌을 받는, 간사한 인간의 시각. 크크) 버스에서 꾸벅꾸벅 졸다가 귤 봉지를 놓칠뻔 한 것 까지, 굽이굽이 산을 돌아 오면서 본, 매번 봐도 질리지 않는 야경까지 다 좋았다. 하지만, 집에 도착하고 문을 열었을 때, 산산조각이 났다.


바퀴벌레가.


꽤 큰놈이었다. 사사삭. 사사사삭. 나는 왜 그 내 몸의 100분의 1도 안되는 놈에게 쫄아야만 하는 것일까? 어릴적부터 그랬다. 바퀴든 뭐든 벌레가 나오면 일단, 난 멈춰 서버린다. 누가 일시정지 버튼을 누른 것 처럼. 그놈이 도망을 가서 내눈에서 보이지 않든, 누군가 달려와서 때려 잡든 어떻게 되어야 정지상태에서 풀려난다. 멋진 야경, 맛있는 저녁, 즐거운 아이쇼핑의 기분이 그 한마리 때문에 백지상태가 되서 덜덜 떨어야만 했다. 그 놈이 빠른 스피드를 자랑하며 사라지고 나서, 나는 뒤늦게 약을 뿌렸지만 결과는 알 수가 없다. 그리고 내 몸엔 두드러기가 돋기 시작했다. 짜증이 난다. 그리고서 방을 돌아다 보니, 뭐가 이렇게 잔뜩인건지. 다 내다버리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다. 날을 잡아서, 정말 이번엔 기필코, 쓸데없는걸 다 내다버려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아마 버릴 날이 오면, 어쩐지 아까워서 이 생각을 내다 버리게 될지 모르겠지만.